현진건의 역사소설이다. 흑치상지 1929년 중국 낙양(洛陽)에서 아들 준(俊)의 것과 함께 출토된 그의 묘지명에 따르면 흑치상지는 원래 백제의 왕족으로서 흑치 지방에 봉해졌기 때문에 흑치씨가 되었다고 한다. 증조부의 이름은 문대(文大) 조부는 덕현(德顯) 아버지는 사차(沙次)이며 흑치상지의 어릴 적 이름은 항원(恒元)이었다. 《신당서》및 《삼국사기》에 입전된 그의 열전에서는 의자왕 때 벼슬은 달솔로서 풍달군(風達郡)의 군장(郡將)을 겸하고 있었다고 적었다. 660년 당(唐)의 소정방(蘇定方)과 신라의 김유신(金庾信)이 각자 지휘하는 18만 나ㆍ당 연합군이 백제를 공격해 수도 사비성을 점령한 뒤 소정방에게 항복하였다. 하지만 당의 소정방이 의자왕을 포로로 삼아 온갖 모욕을 주고 군사를 풀어 젊은이들을 죽이는 등 갖은 약탈을 일삼자 두려움을 느낀 그는 10여 명의 장수와 함께 임존성(任存城)으로 도망쳐 백제 부흥운동에 가담 당에 항거했다. 이때 그를 따르는 무리가 열흘 만에 3만 명이나 모였다고 한다. 소정방은 흑치상지를 치려 했으나 패배했고 흑치상지는 그 기세를 몰아 2백여 성을 회복하였다. 그러나 661년에서 663년 무렵에 백제 부흥군 내부에서 분열이 일어나 부흥군의 수장이었던 귀실복신(鬼室福信)이 함께 거병했던 도침(道枕)을 죽이고 전권을 장악했다가 다시 풍왕(豊王)에게 살해당하는 등 혼란이 거듭되었고 마침내 663년 백강 어귀에서 당병에게 대패한다(백강구 전투). 이 무렵 당 고종의 계속되는 초유(招諭)를 받고 있던 흑치상지는 결국 고종의 초유를 받아들여 함께 백제부흥군 편에서 싸우던 별부장 사타상여와 함께 당에 항복했다. 이때 그는 당으로부터 좌령군원외장군(左領軍員外將軍)ㆍ양주자사(佯州刺史)로 임명되었으며 유인궤의 주선으로 백제 부흥군의 마지막 근거지였던 임존성 공격에 앞장서는 등 당의 장수로서의 삶을 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