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독립운동가, 사학자, 언론인 충남 대전 출생. 호는 단재(丹齋) ·일편단생(一片丹生) ·단생(丹生)이며 필명은 금협산인(錦頰山人)·무애생(無涯生)·열혈생(熱血生)·한놈·검심(劍心)·적심(赤心)·연시몽인(燕市夢人) 등이다.
1905년 2월 성균관 박사가 되었으나, 그해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황성신문(皇城新聞)》에 논설을 썼으며, 1906년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주필로 활약하였다. 민족 영웅전과 역사 논문을 발표하여 민족의식 앙양에 힘썼다. 1906년 3월 국권회복을 위해 교육과 산업을 진흥시켜야 한다는 목표 아래 결성된 대한자강회와 그 후신인 대한협회에 참가했다. 1907년 양기탁·이동녕·이회영·이동휘·안창호·전덕기·이갑·이승훈 등과 더불어 비밀결사인 신민회(新民會)를 결성하고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 등에 가입 ·참가하고, 이듬해 순 한글 《가정잡지》를 편집 ·발행하였다. 1919년 상하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참가, 의정원(議政院) 의원, 전원위원회 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1923년 1월 상하이에서 국민대표회의가 소집되었고 그는 창조파로 활약했다.
1925년 〈동아일보〉에 〈낭객의 신년만필〉·〈전후삼한고〉·〈조선역사상일천년래제일대사건〉 등을 연재 발표하기도 했다. 초기 역사연구는 한말 언론활동 등의 계몽운동과 국권회복운동의 일환으로서 진행되었으며, 〈독사신론〉 등의 역사논문, 이순신·을지문덕 등 국난을 극복한 영웅들에 대한 전기를 비롯해서 〈역사와 애국심의 관계〉 등의 역사관계 논설이 주류를 이루었다.
1925년경부터 무정부주의를 신봉하기 시작, 1927년 신간회(新幹會) 발기인, 무정부주의 동방동맹(東方同盟)에 가입, 1928년 잡지 《탈환》을 발간하고 동지들과 합의하여 외국환을 입수, 자금 조달차 타이완으로 가던 중 지룽항[基隆港]에서 피체 10년형을 선고받고 뤼순[旅順] 감옥에서 복역 중 1936년 옥사했다.
저서에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 《조선상고문화사(朝鮮上古文化史)》 《조선사연구초(朝鮮史硏究艸)》 《조선사론(朝鮮史論)》 《이탈리아 건국삼걸전(建國三傑傳)》 《을지문덕전(乙支文德傳)》 《이순신전(李舜臣傳)》 《최도통전(崔都統傳)》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