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품 소개 강도몽유록(江都夢遊錄)은 작자가 누구며 언제 이 작품이 창작되었는지도 알려지지 않은 몽유록계 한문소설이다. 출전은 국립중앙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는 1책짜리 필사본이다. 이 필사본은 일제 말 국문학 자료와 고문서 등을 수집해 필사해 온 서적중개상 송신용(宋申用) 씨가 서기 1939년 8月 20일 손수 모필(毛筆)로 베껴 쓴 등초본(騰抄本)을 편역자가 캠코더로 촬영해 와서 편역(編譯)한 것이다. 피생명몽록(皮生冥夢錄)과 함께 묶여 있는 이 작품의 작중 배경은 1636년(인조 14년) 12월부터 이듬해 1월에 일어난 병자호란 당시 강도(江都 강화도)가 청(淸) 나라의 군병에 의해 함락됨으로써 죽게 된 수많은 여인의 원령(怨靈)이 주인공인 청허선사의 꿈에 나타나 조정 대신과 강화 수비를 맡았던 관리들의 방탕한 생활상과 본분을 망각한 타락상을 비난하고 또 그들로 인해 나라와 백성이 청나라 군병들에게 짓밟히면서 패전국 백성들이 마지막으로 받아들여야 했던 그 처참한 참상과 가슴에 맺힌 한을 열다섯 여인들이 차례로 등장해 진술하는 것을 청허선사가 몰래 엿들으며 받아 적은 것이 작품의 주 내용이다. 연려실기술(제26권)의 기록에 따르면 청태종은 1636년(인조 14년) 12월 9일 12만 병력을 거느리고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넜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인조는 급히 체찰사(전시 총사령관)인 김류(金?)의 아들 김경징(金慶徵 당시 한성판윤)을 강도검찰사(강화 경비사령관)로 임명했다. 최후의 보루인 강도를 수호해 달라는 임금의 특명이었다. 하지만 김경징은 위기에 빠진 조국을 수호할 자세도 능력도 안 되는 배신자였다. 그는 자신의 가솔과 절친한 친구들을 강도로 먼저 건너가게 하려고 다른 사람들의 출입을 막았다. 짐이 50여 바리나 됐다. 그 때문에 주로 왕족이나 사대부 가족인 피란민들이 수십 리나 줄을 서서 기다려야 했다. 소현세자빈 강씨(姜氏)조차 김포 월곶 나루에서 이틀 동안이나 밤낮을 굶주리며 기다려야 했다. 오죽했으면 세자빈 강씨가 가마 안에서 “경징아 경징아 어찌 이럴 수 있느냐?”고 외쳤을까. 김경징은 강도가 금성탕지(金城湯池 쇠로 만든 성과 끓는 물을 채운 못)이므로 함부로 청나라 군병들이 건너지 못할 것이라고 호언장담했다. 사실 강도는 요사이도 조수의 차가 9.5미터에 이를 만큼 극심하고 물살이 빠른 데다 언덕은 절벽이고 그 밑은 죄다 개펄이라 택리지 의 저자 이중환은 “그나마 배를 댈 수 있는 동쪽의 갑곶진만 잘 지킨다면 외적을 막을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김경징은 강도의 그런 천험한 지형지세만 믿고 날마다 술만 퍼마시며 강도감찰사(강화 경비사령관) 본연의 임무를 잊어버린 지 오래되었다. 보다 못해 피란 온 봉림대군(훗날 효종)이 “술만 마실 때가 아니다.”라고 꾸짖자 김경징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어찌 피란이나 왔다는 대군과 대신들이 나를 지휘하려 드느냐?”고. 이 무렵 청태종 휘하의 예친왕(豫親王) 다탁(多鐸)은 선봉 마부대(馬夫大)의 기병부대에게 압록강을 건너 의주의 백마산성을 우회해 곧바로 한양으로 남하시켰다. 1936년 12월 14일 개성 유수가 청나라 군병들이 개성을 통과했다고 보고하자 인조는 다시 강화도로 파천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그때 이미 강도로 향하는 육로는 끊긴 상태였다. 인조는 도리 없이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들어갔는데 인조실록은 “성 안의 백성 중 부자 · 형제 · 부부가 서로를 잃고 통곡하는 소리가 하늘을 뒤흔들었다.”고 전해 주고 있다. 거기다 남한산성은 1만3000여 병력과 1만4000여 석의 양곡이 있었으나 혹한은 청나라 군사보다 더 무서운 적이었다. 추위에 강한 청군이 눈 덮인 산성을 포위했으나 눈 빠지게 기다리던 삼남의 구원군은 오지 않았다. 이때까지도 김경징은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주지육림에 빠져 있었다. 병자년이 다 저물고 새해가 밝은 1937년 1월 21일 밤 8시경 통진 가수(通津 假守 통진 임시수령) 김정(金?)이 김경징에게 “적의 배가 갑곶 나루로 향하고 있는데 밤에 물을 건너려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하고 첩보 보고를 했다. 그러나 김경징의 반응은 너무나 뜻밖이었다. “군심(軍心)을 어지럽히다니……. 저 놈의 목을 베라.” 어이없는 참수형이 집행되기 직전 갑곶에서 또 다시 급보가 날아들었다. 김정의 말이 사실이었던 것이다. 청군은 딱 한 척의 배로 강도 수비군의 정황을 정탐하고 있었다. 그들은 조선군의 복병을 두려워했던 것이다. 그런데 아무런 저항 없이 갑곶에 정탐선이 닿고 말았으니……. 연려실기술 은 그때 강도에는 몇 안 되는 수비군이 총을 쏘려 했으나 화약에 습기가 차서 폭발하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사실을 확인한 청나라 군병들의 사기는 하늘을 찔렀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조선군이 보이지 않자 그들은 현재의 강화대교 김포 쪽에 대기하고 있던 본대로 백기를 흔들면서 공격 신호를 보냈다. 1월 22일 아침 살을 에이는 강바람을 받으며 적선 40여 척이 염하강을 뒤덮었다. 9미터 이상 만조한 조수를 이용해 한달음에 갑곶나루로 상륙한 청나라 군병 3만여 명의 칼날이 번개처럼 번뜩였다. 대대로 강도에서 삶을 이어온 원주민과 난리를 피해 강도로 피난 온 백성들이 어육처럼 도륙당하기 시작했다. 이때의 참상을 연려실기술 은 “머물러 있은 지 9일 만에 숙의와 빈궁 및 두 대군과 대군의 부인을 협박하여 나오게 하고 드디어 군병을 풀어놓아 크게 노략질하고 관청과 사사(私舍) 집을 모두 불사르며 목을 베 죽이고 얽어매어 온 섬을 도륙한 후에 군병을 몰아 강을 건너 남한산성으로 향했다. 가는 도중에 갓난아이가 눈 위에 기어 다니면서 살기도 하고 혹은 죽기도 하며 혹은 죽은 어머니의 젖을 여전히 빨고 있는 아이들을 볼 수 있었는데 그 수효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강도몽유록은 이런 병란의 기록을 우리들에게 전해주고 있는 작품이다. 이 작품을 쓴 저자는 자신의 이름과 작품을 쓴 시기를 예상치 못한 후환이 들이닥칠까 봐 감추고 있으나 이 작품은 청허선사가 “연미정(燕尾亭) 남쪽 기슭에다 풀을 베어 초막을 엮었다. 선사는 이 초막에서 법사(法事)를 베풀었고 날이 저물면 잠시 불을 지펴 죽이나 밥을 지어 허기를 달랜 뒤 말린 풀 더미 위에 고단한 몸을 뉘였다.”고 묘사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 그해 6∼7월경이 아니면 그 다음해 여름을 작품속의 배경으로 설정하고 있는 것 같다. 특히 이 작품은 편역자가 필사한 한문 원문을 통해 독자들이 원문의 행간 속에 압축되어 있는 소설의 디테일한 부분까지 쉽게 따라잡으며 공감할 수 있도록 한지(韓紙)에 필사한 한문 원문을 현대어로 이해하기 쉽게 편집해 국역본 후미에 전문을 함께 수록한 점이 국문학도와 고전소설을 연구하는 문학도들에게는 압권일 것이다. 이 작품의 한문 원문과 번역본을 함께 읽음으로써 이 작품이 창작될 당시 조선 백성들 사이에 통용되던 고사 성구와 어려운 한자어 원문 낱말들을 현대어로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또 한문소설 특유의 번역투 문장에 싫증을 내거나 어려운 한자어 낱말과 고사 성구 이해에 어려움을 겪으며 쉽게 접근하지 못했던 학생층 독자들과 학창시절 후 취업시험 준비에 쫓기며 젊은 시절 내내 한 번은 꼭 우리 선조들의 삶의 가치와 참모습이 담겨 있는 우리 고전들을 읽어 봐야지 하고 벼루면서도 여태까지 우리 고전을 읽지 못하고 있는 일반 독자층을 위해 편역자가 일상화된 디지털기기들을 통해 우리 고전을 쉽고 편하게 또 저렴하게 우리 고전을 체계적으로 읽을 수 있도록 엔_스크린(n_Screen) 서비스가 가능한 전자책으로 제공하고 있다는 점이 디지털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 독자들에게는 행운일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