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대무신왕 15년.
가을 해가 서편 벌판으로 뉘엿뉘엿 넘어가려 한다.
바야흐로 하늘을 찌를 듯한 고구려의 세력이 한토(漢土)의 낙랑(樂浪)까지도 집어 삼켜서 어제까지도 낙랑의 서울이던 땅이 오늘의 고구려의 일(一)읍으로 되었다. 그로써 읍의 교외 멀리 패수를 굽어보는 아담한 재릉에 한 개 새로운 무덤이 서 있었다.
고귀한 사람의 무덤인 듯, 그 앞에 아로새긴 돌이며 무덤의 높이가 보통 평민의 무덤은 아니었다. 그리고 이 근처의 무덤이 모두 한풍(漢風)을 띄운데 반하여 이 무덤만은 고구려풍이다. -{본문에서}
윤백남은 금융인으로 출발하여 언론인ㆍ연극인ㆍ교육자ㆍ문인ㆍ영화인ㆍ만담가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활동을 펼쳤다. 특히 그는 영화계에 선구적 공적을 남겼고 연극인으로서도 초창기에 극단을 주재하고 희곡을 쓰는 등 신파극을 정화하려고 노력하였다.
그의 작품은 초기에는 계몽주의적·인도주의적 경향을 띠었으며, 또한 경향 소설적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점차 역사소설이나 야담류로 흘렀고, 후기에는 본격적인 야담가로 나섰다.
대부분 정사(正史)를 바탕으로 한 숨겨진 역사의 뒷이야기나, 구전설화, 시대를 대표하는 풍자적, 해학적 이야기들이 흥미롭게 펼쳐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