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산갑자사화(燕山甲子士禍)에 간신의 이름을 받고 죽은 한치형(韓致亨)의 문인으로 있던 조성산(趙誠山)은 처자의 권에 못 이겨 길을 떠났다.
오백여 리 먼 길을 노자 겨우 열아믄 냥을 지니고 길을 떠난 조성산은 과객질을 하며 가기로 방침을 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보다도 더 그의 가슴을 무지근하게 한 것은 처자가 굶주리는 참경을 차마 볼 수 없어 행여나 하고 길을 떠나기는 하였지마는 관서(關西) 백한감사(伯韓監司)의 심지를 잘 아는지라 과연 얼마의 전곡을 얻어올 수 있을까, 그것에 대한 자신이 도무지 없는 일이었다. -{본문에서}
윤백남은 금융인으로 출발하여 언론인ㆍ연극인ㆍ교육자ㆍ문인ㆍ영화인ㆍ만담가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활동을 펼쳤다. 특히 그는 영화계에 선구적 공적을 남겼고 연극인으로서도 초창기에 극단을 주재하고 희곡을 쓰는 등 신파극을 정화하려고 노력하였다.
그의 작품은 초기에는 계몽주의적·인도주의적 경향을 띠었으며, 또한 경향 소설적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점차 역사소설이나 야담류로 흘렀고, 후기에는 본격적인 야담가로 나섰다.
대부분 정사(正史)를 바탕으로 한 숨겨진 역사의 뒷이야기나, 구전설화, 시대를 대표하는 풍자적, 해학적 이야기들이 흥미롭게 펼쳐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