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文)에는 신숙주(申叔舟). 무(武)에는 홍윤성(洪允成).
이렇듯 그 영명을 당시에 번뜩이던 세조조(世祖朝)의 명신 수옹(守翁) 홍윤성이 과거에 응시코자 도보(徒步)로 그 고향 회인(懷仁)을 떠난 것은 경태삼년(景泰三年) 임신(壬申) 호서(湖西) 일대에도 봄소식 무르익는 삼월 하순이었다……
……기운이 장사라 열세 살 때에 나무를 하러 갔다가 산돼지를 맨주먹으로 잡은 일이 있으매 스스로 자기 기운에 대하여 자만하는 마음이 있던 그는 이때부터 어린 마음에라도 더욱 굳게 뜻을 세우고 서울 편을 향하여 희망에 타는 눈쌀을 부라리었다. 그러나 동리 사람 사이에서 받는 바 평판은 결코 좋은 것이 아니었으니, 그것은 너무 자기 힘을 믿는 만큼 자연 횡폭한 행동이 잦은 까닭이오. 또 한 가지는 영웅호색이라니 그처럼 용맹한 성미의 사람이라 마음까지 호방해지어서 드디어 마을의 처녀나 유부녀를 막론하고 심상히 보아 넘기는 일이 없게끔 되었던 것이다.-{본문에서}
윤백남은 금융인으로 출발하여 언론인ㆍ연극인ㆍ교육자ㆍ문인ㆍ영화인ㆍ만담가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활동을 펼쳤다. 특히 그는 영화계에 선구적 공적을 남겼고 연극인으로서도 초창기에 극단을 주재하고 희곡을 쓰는 등 신파극을 정화하려고 노력하였다.
그의 작품은 초기에는 계몽주의적·인도주의적 경향을 띠었으며, 또한 경향 소설적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점차 역사소설이나 야담류로 흘렀고, 후기에는 본격적인 야담가로 나섰다.
대부분 정사(正史)를 바탕으로 한 숨겨진 역사의 뒷이야기나, 구전설화, 시대를 대표하는 풍자적, 해학적 이야기들이 흥미롭게 펼쳐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