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영
`걸죽한 입담과 해박한 풍물묘사`가 돋보이는 장편 역사소설에서부터, `빛나는 감수성으로 눈이 시릴 정도의 박꽃 같은 순백한 사랑을 순정미학의 진수로 그려냈다`는 『홍어』 같은 중편, 그리고 `경쾌한 속도감, 재치의 반전으로 소설적 재미를 가속화 시키는`단편들에 이르기까지 소설가 김주영의 문학적 폭은 아주 넓다.
지독스레 가난한 산골에서 태어나 `탯줄을 끊고 난 그 순간부터` 절박한 생존의 문제에 부딪히며 굶주림에 시달렸다. 아버지가 군청에 다녔지만 그 시절의 가난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하룻밤을 자고 나면 그 날의 잠자리를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서 김주영은 어릴 때부터 떠돌이가 되었다.
초등학교 때 학교를 파하고 나면 대개 버스 정류장 근처를 어슬렁 거렸다. 떠나고 싶다는 욕구 때문이었다. 당시의 그에게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사람은 아버지요, 가장 미운 사람은 어머니`였다. 시를 쓰고 싶다는 욕구 역시 그를 밖으로 내모는 원초적 동력이었다.
결국 열여섯에 대구로 떠나 풍찬노숙을 일삼으며 대구농림고를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와 친구집에 붙어 살며 서라벌예대에 진학하게 된다. 모두 다 공부를 핑계 삼은 `탈출`이었다.
평론가 김화영은, 김주영 문학에 신발 이야기가 유난히 많이 나오는 것은 그의 떠돌이 의식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고 하였다. 어릴 때부터의 떠돌이 생활 때문에 오늘날까지도 뜨거운 방에서는 자지 못하고, 찬바람 도는 거실에서만 잠이 온다는 김주영이다.
대학에 진학한 김주영은 박목월, 서정주 같은 대스승들을 만나 문학에의 열정을 불태운다. 당시에 박목월은 시인을 꿈꾸던 김주영에게 시보다는 소설을 권했다.
이후 10년간 안동의 엽연초생산조합에 근무하다가 끝내 회사를 그만 두고 글쓰기에 전념. 1971년 등단한다. 유년의 시골장터에서 목격한 봇짐장수들의 고달프고 강인한 삶을 그린 『객주』는 1979년부터 5년간 서울신문에 연재되어 우리 역사소설의 빛나는 업적들인 『임꺽정』 『장길산』 과 동등한 반열에 올랐다.
당시 김주영은 녹음기와 카메라를 든 채 장이 서는 곳마다 찾아다니면서 민초들의 언어를 채집했다. 그와 한평생 어울려 지낸 소설가 이문구는 김주영이 소설을 쓰기 위해 깨알같이 메모해둔 노트를 보고 `이것은 피다.이것은 피를 흘리는 김주영의 모세혈관`이라고 썼다.
1989년 김주영은 절필 선언을 했다. 한국일보와 7년간에 걸친 연재계약을 한 지 불과 1년만의 일이었다. 자신의 소설이 `동어반복`이 너무 심하고, 상업성에 침식되어가고 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오랜 글쓰기의 경험으로 독자를 교묘하게 속일 수 있다손 치더라도,그러나 도대체 그것이 무엇이란 말인가.원고료와 인세가 나의 생활인가.그렇지 않다.그렇지 않아야한다.그럴수는 없다.`
그의 이러한 선언은 타성적인 문학행위에 충격을 가하는 계기가 되었다. 2년 후 그는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으며, 여러 편의 대하역사소설을 완성한 후 『홍어』라는 새로운 감각의 소설로 독자와 평단의 갈채를 함께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