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숙
어떠한 환경에 처해서도 인간은 결국 제 갈 길을 가고 만다는 것을 신경숙처럼 잘 보여주는 예도 드물다.
초등학교 6학년 때야 처음으로 전기가 들어온 깡촌에 살면서도 게걸스러울 정도로 읽기를 좋아해, 버스 간판이고, 배나무 밭에 배를 싼 신문지며, 「새마을」이나 「새 농민」에 나오는 수필이나 소설까지 빠뜨리지 않고 읽었던 것은 그의 '싹수'를 보여 준다. 시인이 되려던 셋째 오빠의 영향으로 오빠가 갖고 있던 시집들을 두루 읽을 수 있었던 것도 그의 행운이었다.
그러다가 그 시절 동년배의 다른 누이들처럼 고향을 등지고 서울로 올라온 것이 열 다섯 되던 해인 1978년. 구로 3공단 전철역 부근 서른 일곱 가구가 다닥다닥 붙어 사는 '닭장집'의 '외딴 방'에서 큰오빠, 작은오빠, 외사촌이 함께 누워 잤다.
공단 입구의 직업훈련원에서 한 달 간 교육을 받은 후, 공단 안쪽 동남전기주식회사에 취직했을 때 그의 이름은 스테레오과 생산부 A라인 1번. 공중에 매달려 있는 에어드라이버를 당겨 합성수지판에 나사 일곱 개를 박는 것이 1번의 일이었다.
영등포여고 산업체 특별학급이 생긴 것은 그가 공장에 취직한 지 4개월 뒤. 매일 다섯 시 국기하강식이 거행되면 공장을 나와 학교로 향했다. 그러나 적응이 잘 되지 않아 학교를 며칠 빠졌는데 선생님이 반성문을 써오라고 해서 노트 반 권 정도를 채워서 가져갔다. 반성문을 다 읽고 난 선생님이 정색을 하고 신경숙에게 했던 말은, '너 소설 쓰는 게 어떻겠니?' 였다. 신경숙의 인생을 바꿔놓은 한 마디였다.
(신경숙에게 글 쓰기를 권했던 영등포여고 교사 최홍이는 제자보다 한참 늦은 1999년에 <평교사는 아름답다>는 제목의 교육 현장 에세이집을 냈다.)
컨베이어벨트 아래 소설을 펼쳐 놓고 보면서, 좋아하는 작품들을 첫 장부터 끝장까지 모조리 베껴쓰는 문학수업이 시작된 것은 그 시절부터였다. 3년 뒤 대학에 진학했으나, 춥고 외로웠던 구로 공단에 비하면 너무도 환하고 자유로운 다른 세상이라 같이 웃을 수조차 없었다. 오빠가 사준 100권 짜리 삼성출판사 한국문학전집을 모조리 읽어 내리면서 방학 때마다 소설 베껴쓰기에 푹 빠졌다.
스물 둘에 등단했으나 사람들은 그를 별로 주목하지 않았다. 다시 다섯 해가 지나고 방송국 음악프로그램 구성작가라는 안정된 직업을 갖고 일하던 어느 가을 날, 곧 서른이 되는데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왠지 허전해, 약사 동생에게 말한다. '나 1년만 용돈 줄래? 내가 쓰고 싶은 소설 맘껏 써보고 다시 일하러 가면 안될까?'
유학이라도 보내 주겠다는 동생의 승낙을 받자마자 방송국을 그만 두고, 집에서 글만 썼다. 1년 동안 「풍금이 있던 자리」「멀리, 끝없는 길 위에」 등 대여섯 편을 썼고, 이것이 작품집으로 묶여 나오면서 더 이상 방송국으로 돌아갈 필요가 없게 되었다.
신경숙 문학의 밑바탕을 흐르는 도도한 저류는 사랑이다.그 감성의 세계를 특유의 감수성과 고요한 문장, 균형미,그리고 무엇보다 그 모든 것이 내적 시선과 어우러져 자아내는 넓고 깊고 적막한 여운으로 묘파해 내는 것이 신경숙 문학의 독특한 매력이다.
신경숙은 글을 쓸 때 건강 상태, 정신 상태가 최고조에 이른다고 한다. 리듬감이 생겨 생기롭고,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모든 감각 기관이 열려 있는 느낌이 된다. 앞 문장을 따라 뒷 문장이 이어지면 그 때가 바로 신경숙이 살아 있음을 만끽하는 때다. 애초에 소설을 쓰지 않는 신경숙이란 존재할 수조차 없었을 것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