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소진
90년대 리얼리즘의 최고봉. 황석영, 이문구, 윤흥길, 조세희로 이어지던 70년대 사실주의 전통의 계승자. 한국적 감성이 흠뻑 묻어나는 토속어와 사투리의 향연 속에, 힘없는 백성들의 시시콜콜한 삶의 속내를 때론 구수하게, 때론 코끝 찡하게 풀어놓았던 한국 문학의 소중한 자산.
이 모든 수사들은 요절한 작가 김소진에게 바쳐진 헌사들이다. 「한겨레」 신문의 문화부 교열부 기자로 일하다가 `더 이상 늦기 전에 내 문학과 싸워 보겠다`며 전업 작가로 나선 지 일 년. 그리고서는 불과 한 달 반을 앓고서, 서른 넷에 훌쩍 세상을 떠나버렸다.
통증 속에서도 작품을 쓰고, 죽음 직전까지도 신들린 듯 작품을 구상하며 마지막 한 방울까지 자신을 `소진`했던 그이지만, 그 어떤 승부를 가리기에는 너무나 짧은 세월이었다.
김소진의 문학적 뿌리는 그의 아버지에게 가 닿아 있다. 이북에 가족을 두고도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이남을 선택했던 아버지, 경제적으로는 무능하기만 했던 아버지와의 싸움과 화해의 전말은 그의 문학에 중요한 동력의 하나였다.
어린 시절의 김소진은 아버지의 경제적 무능력을 증오했다지만, 질풍노도의 80년대를 겪으면서 비로소 아버지의 삶을 받아들였다. 그에게 있어 아버지란 우리 현대사의 질곡과 힘없는 백성의 삶을 상징하는 문학적 화두였다.
이제는 재개발에 밀려 사라지고 없는 서울 미아리 삼양동의 달동네도 그의 중요한 문학적 터전이었다. 이 달동네의 `장석조네 사람들`은 그의 아버지, 어머니와 함께 한국 현대사를 악다구니로 살아 온 `돈 없고 없는` 서민들의 전형이었다. 때로는 비굴하면서도 끝내는 검질긴 생명력을 잃지 않는 이들의 모습을 통해 김소진은 그 나름대로 90년대식 `희망`을 말하였다.
우리가 사는 공동체의 현실에 철두철미 뿌리 박고, 인간과 역사에 대한 신실함을 견결히 유지하였던 것, 그럼으로써 문학 본연의 소명에 충실하고자 했던 것은 김소진 문학의 근원적 미덕이었다.
김소진 문학의 또 한 가지 성취는 우리 말의 진수성찬을 이뤄낸 데 있다. 그는 문학 수업 시절 우리말 사전을 `씹어 먹어가며` 공부했다고 한다. 이런 노력을 통해 그의 작품들은 우리말의 향연이 되었고, 한국적 현실을 묘사하는 가장 적확한 언어로서 우리말의 생활력을 과시하는 전범이 되었다.
김소진이 90년대 작가들 가운데 흔치 않은 예외적이고 문제적인 작가로 자리 매김되는 이유는, 우리말을 절차탁마하고 우리 시대의 리얼리즘을 추구함에서 보여준 그 투철한 작가정신에 기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