늪을 건너는 법

구효서 | 문학동네 | 2015년 05월 19일 | EPU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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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소개

우리가 한 번은 떠나보낸, 그러나
먼길을 돌아 다시 도래한 이방인 같은 소설
― 23년 만에 다시 읽는다, 소설가 구효서의 첫 장편소설

1991년 『문예중앙』 봄호에 발표되고 그해 6월 단행본으로 선보인, 소설가 구효서의 첫 장편소설 『늪을 건너는 법』이 23년 만에 새 옷을 입고 출간되었다. 1987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마디」가 당선되고 3년이 지난 1990년, 작가는 자신의 첫 장편 『늪을 건너는 법』을 썼다. “등단 3년, 직장생활 3년, 결혼 3년째였고 아이가 세 살이었”던 “모든 게 세 살인 시절”, 작가는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7시까지 이 소설을” 쓰고 직장으로 출근했다. 작가의 작품세계에서도 ‘새벽’에 해당하는 첫 장편을 탈고한 후, 작가는 다니던 직장(문학사상사)을 그만두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전업작가의 길을 걷고 있다.

작가는 출간 당시 한 인터뷰에서 “우리가 굳게 믿고 있는 것들에 대해 회의를 가져보자는 생각에서 이 작품을 쓰게 됐으며 기존 소설에 대한 일종의 반발심으로 기법 또한 ‘과거를 훑어나가는’ 새로운 방법을 채택했다”(경향신문 1991년 5월 21일자)고 집필의도를 밝힌 바 있다. 그래서였을까, 당시 신예작가 구효서의 작품들은 80년대 해체시에 대응하는 해체소설로 읽히기도 했다. 또 그는 전통적 소설 문법을 거부하는, 형식 실험을 하는 작가로 평가받기도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는 추리소설적 긴장감과 속도감으로 단숨에 읽히는 작품을 쓴다는 점에서 평단과 독자의 인정을 동시에 받아왔다. “설화적인 것과 소설적인 것의 절묘한 결합에서 오는 긴장감의 지속성이 독자를 이끄는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는 문학평론가 김윤식의 평처럼 말이다.

당신의 피와 이름과 과거와 성장과 의지와 사랑 모두가 조작되었다
『늪을 건너는 법』은 이탈리아 월드컵이 한창이던 1990년 여름, 사십대 중반의 주인공 전봉구가 겪은 기이한 경험을 그 자신이 회고하고 기록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일제시대 자본가의 아들로 태어나 유복한 환경에서 성장해온 전봉구는 현재 사원 천여 명 규모의 기업체 부사장이다. 그러나 지금껏 그의 일생을 지배해온 남부러울 것 없는 평온한 일상은 그해 여름 발신인 불명의 팩스 두 통이 배달되면서부터 조금씩 흐트러지기 시작한다. “당신은 당신의 가족 중에 죽은 맏딸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가”(14쪽)라는 내용이 전부인 첫번째 팩스, 그리고 같은 문장으로 시작하되 훨씬 내용이 길고 구체적인 두번째 팩스가 주인공에게 배달된 것이다. 팩스는 이렇게 전한다. 당신(전봉구)이 알지 못하는 맏누이가 있는데, 그 맏누이는 열세 살 때 아버지로부터 호된 질책을 듣고 충동적으로 자살한다. 그런데 이 자살이 당신의 존재(출생)와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당신은 지금까지 친어머니로 알아온 고씨 부인의 소생이 아니라고, 당신의 친어머니는 따로 있다는 것이다.

사장인 형과 부사장인 자신을 이간질시키려는 노조 간부들의 장난질인가, 하는 게 이 팩스에 대한 주인공의 반사적 대응이었는데, 어찌된 일인지 평소 자신답지 못하게 그 팩스 내용을 떨치지 못한 그는 차츰 불면에 시달리게 된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균형감각과 현실감각을 회복시키고자, 자신 출생의 비밀을, 가족의 진실을, 어머니의 실체를 제 손으로 밝혀내기 위해, “얼마간 당신의 현재 삶과, 그 삶이 일방적으로 요구하는 당신의 입장과 처지로부터 멀찌감치 떨어져서 전혀 다른 관점으로 자신과 세상을 되돌아”(15쪽)보라는 팩스의 요구대로 본적지 강화도로 떠난다.

주인공은 강화도를 세 번 방문하는데, 이 세 번의 여정에 대한 기록이 소설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생모의 귀환’이라는 문제의 실체를 파헤치고자 주인공은 기사처럼 모험길에 나서고, 다양한 조력자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등장해 모험을 떠난 주인공을 돕는다. 리리코의 미즈 정, 통대, 뽀로수 할머이, 이씨 집성촌의 이성희, 향토사학자 김송배, 오호자의 조카 오씨, 초지진 관리인 이씨, 무당 최무수 등등. 그러나 이 조력자들은 전통적인 의미의 조력자 역할에 관심이 없는 편이다. 이들은 각자의 시선과 입장에서 주인공에게 이야기를 전하는데, 이는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단편 「덤불 숲」(살인사건에 대한 4인의 서로 다른 시선과 입장)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진실에 가까이 접근할 때마다 나는 점점 알몸이 되어갔다, 부끄러웠고 또 두려웠다
첫번째 강화도행에서 주인공은 일제시대 악덕 자본가이자 호색한(주인공의 탄생 배경이기도 하다)이었던 아버지의 실체를 알게 되고, 두번째 방문에서는 어머니의 실체를 희미하게나마 파악하게 된다. 아버지의 회사 동화고무의 생산직공이었던 이포전이 전봉구의 어머니라는 정황이 드러난 것이다. 세번째로 찾은 강화도에서 주인공은 이포전이 사주 전만호의 추행에 의해 임신했다는 재판 기록을 읽고, 그녀가 자신의 어머니임을 확신하게 된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주인공은 어머니의 실체를 확인하자마자 또다른, 더 강력한 과업을 부여받게 된다. 어머니가 속해 있던 ‘나림’이라는 집단의 미스터리한 성격이 주인공을 더 깊은 “혼돈과 미망의 늪”으로 빠뜨린 것이다. 소설 중반 무렵 플롯은 또다른 국면으로 접어든다.

‘나’라는 존재의 일차적 뿌리(어머니의 존재)를 확인한 후 전봉구는 보다 근본적인 뿌리(어머니의 배경)를 파헤치기 시작한다. 그러나 ‘녹두’ ‘백절교’로도 불리는 이 ‘나림’은 삼별초의 후예라는 견해, 무신정권에 반대한 노비의 후예라는 견해, 유배된 왕족의 후예라는 견해, 역사의 희생양이라는 견해 등 갖가지 다른 설명이 더해지는 집단인 까닭에 주인공은 점점 그 실체로부터 멀어져만 간다. 그러다 주인공은 이 여름 강화도행을 감행하기 전 자신과 기이하고도 제의적인 정사를 가졌던 ‘리리코의 미즈 정’ 부고기사를 읽고 서둘러 서울로 돌아온다. 그간 미즈 정으로만 알고 있었던 그녀의 이름이 어머니의 이름과 같은 ‘포전’임이 부고기사를 통해 밝혀진 것이다. 포전은 백절교의 직제 가운데 하나이다. 이 여름의 혼륜이 시작될 때 ‘관계’ 맺기 시작한 그녀가, 어머니와 같은 이름을 가진 그녀가, 현재 백절교의 일원인 그녀가 죽자 주인공은 그간의 여정을 접고 도망치듯 귀경길에 오른다.

주인공은 서울로 돌아와 경기도 광주 인근의 정포전 장례식에 참석하지만, 괴이하고 섬뜩한 추도 행사를 견디지 못하고 한번 더 도망치듯 서울로 빠져나온다. 1990년 여름의 깊은 혼돈에서 주인공은 결국 도망치는 방식 외에 다른 해법을 구하지 못한 셈이다. 주인공은 그래서 이 혼륜의 여름을 기억으로라도 남기고자 이 이야기를 기록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소설은 글쓰기에 대해 자의식적인 언급을 수차례 반복하고, 현실 재현이나 진리 추구에 대해 반성적으로 접근한다는 점에서 메타픽션이라 할 수 있다.)

내가 이루어놓은 모든 것들이 소중하게 여겨지기 시작했다. (……) 그것들을 꼭 붙들어야 할 것 같았다. 나를 숨길 숲이었으므로. 길이 들어 자유스러워진 일상을 그 숲 밖에서는 찾을 수 없을 것 같았으므로. 그것들에 내 몸뚱어리를 붙들어매는 데 필사적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늪에서 기어나와 숲으로 들어갈 차례였다. 죽을 때까지 숲에서 나오지 말아야 했다. 이 기록은 숲이 울창하도록 나무 한 그루를 더 심는 일인지도 모른다.
어머니를 찾는 일에 난 왜 철저하지 못했을까. 어머니뿐만이 아니었다. 나는 아버지를 드러내는 일에도 소홀했다. 돌이켜보면 섬사람들에게서 나림과 동화고무에 관한 훨씬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 그들에게 질문을 할 때마다 내가 입고 있는 옷들이 한 벌씩 벗겨져나가는 착각에 빠져들었었다. 나의 옷이 대답의 대가로 그들에게 지불되는 화폐이기라도 하듯. 어머니에 관한 힌트 한 가지를 얻을 때마다 나는 점점 알몸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착각에 몸을 움츠렸다. 알몸으로 샅샅이 벗겨지기 전에 섬을 탈출할 각오를 미리 다짐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때 벗겨나간 옷들을 필사적으로 다시 주워입고자 하는 것은 아닐까. 그 옷 속에서 아내의 남편, 자식들의 아버지, 건실한 중소기업의 부사장으로 살아가는 것에 만족하려는 것이 아닐까. 누에가 고치를 짓듯 옷의 내벽에다 끊임없이 각질의 성을 쌓으며.
그 여름을 기록하려는 이유가 명확하게 정리되지는 않았지만 난 더 오래 참을 수가 없어서 백지 앞으로 달려들었다. 모든 것은 스스로 존재할 권리를 갖듯이, 내 글도 일단 기록을 시작하고 나면 나름의 존재 이유를 얻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에서.(204~205쪽)

부적을 그리듯 써내려간 지난여름의 혼륜, 허무 그리고 늪
해설을 쓴 문학평론가 류보선은 『늪을 건너는 법』에서 ‘문명과 야생’의 관계를 닮은 여러 이분 구조를 읽어낸다. 주인공에겐 가해자 아버지(전만호)와 피해자 어머니(이포전)가 양립하는 이분 구조이고, 삶과 죽음, 국가와 녹도, 서울과 강화 또한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 같은 대립항들은 표면상으로만 맞설 뿐, 한 단계 아래 층위에서는 서로가 공생하고 공존하기 마련이다. 문제는 유한한 인간이 그 한 단계 아래 층위에 접근하면 할수록 그 실체가 허무에 가까워진다는 데 있다. 소설 후반 “늪에서 기어나와 숲으로 들어갈 차례였다. 죽을 때까지 숲에서 나오지 말아야 했다”(205쪽)는 주인공의 다짐과 깨달음은 그래서 나왔을 것이다. 진실과 실체에 접근하고자 노력하면 할수록 내가 입은 옷들이 한 벌씩 벗겨져나가는 건 아닐까, 이러다 알몸으로 세상을 마주하는 건 아닐까, 하는 불안감 때문에 결국 주인공은 균형감각과 현실감각의 회복이라는 애초 목표를 포기하고 섬을 탈출하기에 이른다. (이처럼 자명하고도 허무한 실체를 발견하게 되었다는 게 주인공의 성과라면 성과일 것이다.)

주인공을 따라 먼길을 우회하자 이 소설 속에 산재한 갈등들이 끝끝내 실체나 진실 파악의 형태로 해소되지 않은, 해소될 수 없는 까닭이 저절로 드러난 셈이다. 류보선은 “이방인은 문제를 가져오고, 질문을 한다”라는 데리다의 말을 빌려 『늪을 건너는 법』을 이렇게 표현한다. “우리가 한 번은 떠나보낸, 그러나 먼길을 돌아 다시 도래한 이방인 같은” 소설이라고. 그리고 이렇게 해설을 마무리짓는다. “바야흐로 이제 우리가 늪을 건널 차례이다.”

저자소개

구효서

1957년 강화에서 태어나 1987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마디」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장편소설로 『늪을 건너는 법』 『슬픈 바다』 『추억되는 것의 아름다움 혹은 슬픔』 『낯선 여름』 『라디오 라디오』 『비밀의 문』 『남자의 서쪽』 『내 목련 한 그루』 『몌별』 『나가사키 파파』 『랩소디 인 베를린』 『동주』, 소설집으로 『노을은 다시 뜨는가』 『확성기가 있었고 저격병이 있었다』 『깡통따개가 없는 마을』 『도라지꽃 누님』 『아침 깜짝 물결무늬 풍뎅이』 『시계가 걸렸던 자리』 『저녁이 아름다운 집』, 산문집으로 『인생은 지나간다』 『인생은 깊어간다』 등이 있다. 한국일보문학상, 이효석문학상, 한무숙문학상, 허균문학작가상, 황순원문학상, 대산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목차소개

늪을 건너는 법

해설 | 류보선(문학평론가) | 원초적 어머니의 유혹과 (야생의) ´그것´들의 귀환

작가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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