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들어줘라.
그것이 무엇이든, 잘 들어주는 게 중요하다."
저마다의 이명으로 비명을 내지르는,
지극히 외로운 이들을 향해 귀기울이는 시간…
지금 여기, 를 환상의 거기, 로 옮겨 더욱 생생하게 빚어내는 작가
염승숙의 세번째 소설집
두 권의 소설집과 한 권의 장편소설을 펴내면서, 주목받는 신인에서 기대되는 젊은 작가로, 색이 분명한 자신만의 소설 세계를 구축하고 있는 염승숙 작가의 신작 소설집 『그리고 남겨진 것들』이 문학동네에서 출간되었다. 2013년 장편 『어떤 나라는 너무 크다』(현대문학)를 펴낸 후 1년, 소설집으로는 2011년 『노웨어맨』(문학과지성사) 이후 3년 만에 펴내는 세번째 소설집이다. 이상문학상 후보에 오른 「습(濕)」을 포함하여, 2012년 봄부터 2014년 가을까지 발표한 10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적지 않은 편수의 작품이 단단하게 엮여 있는 이번 소설집에서, 독자들은 성실하고 믿음직한 젊은 작가의 세계를 향한 지긋한 시선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등단한 지 햇수로 10년, 스물네 살이던 2005년에 「뱀꼬리왕쥐」로 『현대문학』에 등장했을 때, 염승숙 작가가 펼쳐 보인 거침없는 환상성은 평단과 독자의 주목을 받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그의 상상력에는 경계도 한계도 없고, 화려한 수식 없이 간결하고 담담한 문체는 그가 빚어낸 환상의 공간을 더욱 견고하게 만들었다. 이번 소설집에도 이러한 특색은 그대로 이어진다. 가령 이런 식이다.
첫번째 작품 「습(濕)」의 주인공인 진구오는 온라인 장례업체 직원이다. 집에는 등에 소나무가 자라나기 시작한 아버지가 있고, 회사에는 스튜어디스를 꿈꾸다 암으로 죽어버린 첫 의뢰인이 온라인상에 남긴 흔적들을 찾아 지워야 하는 일이 있다. 그는 평생 이발사로 살아온 아버지의 인생과 꿈만 꾸다 쓸쓸하게 죽어간 그녀의 삶 한가운데에서 "습기를 조심해야 한다"는 아버지의 말을 떠올린다.
이어지는 두번째 작품은 표제작 「그리고 남겨진 것들」이다. 외롭게 홀로 죽음을 맞이한 한 사내가 벽돌이 된다는 독특한 상상력이 눈길을 끄는 작품이다. 반복되는 업무와 그 조차도 기계에게 자리를 내주어야 했던 주인공은 우울증과 비만으로 결국 아내와도 헤어지고 외톨이로 죽음을 맞이한다. 그후 아내와의 추억이 있는 거리의 담벼락을 이루는 하나의 벽돌로 눈을 뜬 주인공은, 외로운 이들은 벽돌이 되어 그리운 곳으로 돌아가는 것인가에 대해 생각하며 점점 벽돌로서의 삶에 익숙해져간다.
이외에도, 청력을 상실해가는 사람들이 늘면서 그 상실 정도에 따라 구역을 나누어 살게 된 사회에서 특별한 ´귀´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비극적인 이야기를 담은 「눈물이 서 있다」, 페스트와도 같이 급속하게 퍼져나가는 AI로 인해 인공 비를 뿌려 방역을 하는 사회에서, 어느 날 자신이 감염자가 되었음을 알게 된 주인공의 하루를 그린 「호우」, 원래는 검은 얼굴이었으나 그 얼굴을 잃어버린 양이 느닷없이 집으로 찾아온 이야기 「양의 얼굴」 등에서 염승숙 작가 특유의 놀라운 환상성은 빛을 발한다.
염승숙 작가의 작품이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그 어디에서도 들어본 적 없는 낯선 이야기들 속으로 가만가만 따라 들어가다보면, 지금 우리가 발 딛고 선 이곳의 모습이 이처럼 적나라하게 드러난 이야기가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현실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다는 것이다. 거대한 구조 속에서 소외된 한 개인의 이야기는 염승숙 작가가 오랫동안 관심을 기울여온 주제였다. 앞서 언급한 작품들에서 독특한 상상력 저 뒤편에 ´잊히다´ ´외톨이가 되다´ ´잃어버리다´ 등으로 대변되는 현대인의 슬픔이 고스란히 담겨 있음을 보아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세상에서 가장 긴 점심식사를 하러 호주로 떠난 아빠가 돌아오지 않아 홀로 남겨진 아들이 아빠의 식당을 지키는 「노래하는 밤 아무도」, 숭례문이 불타던 날 멀지 않은 곳에서 택시를 몰던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은 아픔을 간직한 남매의 담담한 대화가 인상적인 「나라의 오후」, 모두가 불면에 시달리는 시대에 ´잠´을 사기 위해 인사도우미 아르바이트를 하는 주인공의 이야기를 담은 「완전한 불면」은 좀더 현실적이고 적극적인 방법으로 비루한 현실을 살아가는 오늘날 우리들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한편, 책의 뒷부분에 실린 두 편은 화자가 소설가라는 점에서 작가의 솔직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작품으로 읽힌다.
「시절의 폭」에 등장하는 화자는 몇 년간 소설을 쓰지 못한 채 무언증에 빠져 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아버지를 잃은 사촌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뿐이다. 사촌의 아버지이자 화자의 작은아버지는 제주 바다에서 평생을 살아온 분으로, 자신이 가까스로 살려낸 범고래를 바다로 방류하던 날 그 자리에서 백상아리의 먹이가 되어버리는 장면을 목격하고는 생의 의지를 잃어버린 사람이다. 그런 아버지를 자신의 사정으로 미국으로 모시고 간 사촌은 말도 안 통하는 타지에서 쓸쓸히 죽음을 맞이한 아버지에 대한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다. 우리가 "세계와 자연이라는 그야말로 무한에 가까운 미궁 속"을 살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면서, 작가는 "불가사의한 섭리의 예기치 않은 작동 앞에 한없이 무력해진 개인들의 망연자실 또는 판단중지"(조형래)를 세밀하게 그려낸다. "누가 알 수 있었겠어, 형. 그런 식으로 끝나버릴지, 누가 알았겠어?"라는 사촌의 말에서 전해지는 세계의 불가해 앞에, 소설가인 화자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는 상태로 이야기를 들어주는 일을 수행한다. 이것은 소설집 제일 처음에 자리한 작품 「습(濕)」에서 "잊히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니"라고 말하던 아버지가 "잘 들어줘라 (……) 그것이 무엇이든 잘 들어주는 게 중요하다"라고 했던 당부와 자연스럽게 연결이 된다. 어쩌면 작가는 비록 이 사회에서 소외되고 사소한 사람들일지라도 잊지 않기 위해서,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것을 있는 그대로 쓴다. 그것이 소설이다.
자전소설로 발표한 「청색시대」가 말하고 있는 바가 이것이 아닐까. 아버지의 죽음 이후 마음이 무거워져 아무것도 할 수 없던 화자는 "어찌해, 와 같은 말들을 중얼거렸고, 그러다보면, 세상은 개인이 좀처럼 어찌하거나 어찌해볼 수 없는, 거대한 불가해의 공간으로 인식되었다"고 고백한다. 노력의 결과를 증명하는 자리로서의 각종 대회나 대전 따위를 좋아하던 아버지를 기억 속에 품고 살지만, "대학 입학을 위해 서울로 올라온 스무 살 이후부터", 화자는 "정당하고도 건강한 싸움을 바라는 건 순진무구한 짓이야, 라고 자조할 수밖에 없는 세대로 살았다". "예를 갖추지 않는 이 세계, 이 시대, 이 도시"에 내던져진 화자에게 아버지의 죽음 역시 자신이 어찌할 수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차차 인정하게 된다. 인생이란 "잘 모르고, 또 모르겠는 것. 이것 아니면 그것, 여기 아니면 저기가 아니라, 양날의 검처럼 단 두 면이 아니라, 내가 차마 알지 못하고 정답을 말할 수 없는, 숨겨지고 감춰진 여분의 선택지"라는 것을. 그래서 그는 소설을 썼다. "썼지만, 여전히 뭣도 아니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이번 소설집의 해설을 쓴 조형래 문학평론가의 말을 빌리면, "깊은 어둠의 무한이든 지극히 미소한 존재로서의 ´나´든, 오로지 있다는 사실에 있어서만큼은 엄연히 동등하"므로, "그렇게 각각의 소설을 유일무이한 개별적 ´사실´로서 세계 속으로 내보내는 것이며, ´나´의 소설을 쓰는 행위 역시 그렇게 변경 불가능한 사실로 확정된" 것이다.
전작에서 찾아볼 수 없는, 소설에 대한 작가의 생각을 담았다는 점에 이번 소설집이 가지는 특별함이 있다. 그런 의미로, 첫 소설집부터 지금의 세번째 소설집에 이르기까지, 각각의 책에 실린 ´작가의 말´을 살펴보는 일은 흥미롭다. 매번 ´작가의 말´을 통해 염승숙 작가는 자신의 소설이 걸어가는 길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첫 소설집 『채플린, 채플린』에서는 "내가 누구이며 어디서 왔는지 알고 싶었고, 일 초 전에 숨쉬던 나는 일 초 후에 어디고 가는지 묻고 싶었다. 말하고 생각하는 내가 진짜 ´나´인지 의심스러웠고, 나를 살게 하는 이 역시 정말 나란 주체가 맞는지 의아스러웠다. ´숨´이 어디로부터 오는지도 알지 못하면서, 내가 분명 여기 이렇게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증명해낼 수 있는지 나는 두려웠다. 존재하는 모든 이야기를 갖고 싶어했던 건 결국 그 두려움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소설을 쓰게 된 이유인 ´왜´를 밝혔다. 그리고 이어진 두번째 소설집 『노웨어맨』에서는 "나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아무것도 아닌 채로 가만 보고, 듣고, 걸으며 썼다. 매일 그리울지라도, 매 순간 아무것도 아닐지라도"라는 말로 그저 보고, 듣고, 걸으며 쓴다는 ´어떻게´를 알려주었다. 그리고 이번 소설집에 이르러, "어떻게 이토록 무력할까, 그리운 것은 어째서 모두 멀리 있을까, 고민하는 때엔 여지없이 고독했고, 그럴 때면 지키고 싶은 것에 대해, 소중한 것에 대해, 아름답다 여기는 것에 대해, 그리하여 끝내 마음 아파지는 것에 대해, 쓰게 되었다. 잊지 않기 위해, 기억하기 위해서"라고 자신이 ´무엇을´ 쓰는지를 드러낸다. ´나´를 알고 싶었던 작가는 자신이 아무것도 아님을 깨닫고 보고 듣고 걸으며, 지키고 싶은 것에 대해, 소중한 것에 대해, 아름답다 여기는 것에 대해, 그리하여 끝내 마음 아파지는 것에 대해, 잊지 않고 기억하기 위해서 쓰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번 소설집은 염승숙 작가의 소설 세계가 한 단계 도약을 하게 된 가장 중요한 책이 될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추측해본다. 작가가 있는 그대로 전하는 이야기이자 우리가 들어주어야 할 이야기, 동시에 작가가 잊지 않으려는 이야기면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이야기라는 것만으로도 그 이유는 충분할 것이다.
● 책 속으로
잊히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니.
먼 데 시선을 두며 아버지도 쓸쓸히, 언젠가 그렇게 말했다. 이발소가 추억의 장소라니 웃기지도 않네, 라며 진구오가 그답지 않게 화를 냈을 때 아버지는 예의 그 검은 얼굴로 텔레비전 앞에 앉아 있었다. 수건을 쓰고, 빨고, 말리고, 접어 개는 일을 평생 동안 해온 아버지가 그날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어깨를 옴츠리고는, 바싹 마른 수건의 네 귀퉁이를 착착 모아 접고 있었던 것이다. 그저 그렇게 잊고 잊히는 것이 인생의 자연스러운 이치인 거라는 투의, 어른답게 타이르는 훈계나 잠언 따위를 기대했는데 아버지는 생각지도 않게, 나는 잊히고 싶지 않은데 말이다, 라고 말하며 허리를 푹 숙였다. 투정을 부리듯 조금은 분하고 억울하다는 뉘앙스로, 나는 잊히고 싶지 않은데 말이다, 하고 그러나 그것도 아주 잠깐, 아버지는 곧 허, 하고 웃으며 고개를 번득 들었다. 수건으로 얼굴을 감싼 아버지의 납작한 뒤통수와 희고 얄브스름한 머리칼 따위를 진구오는 지금도 잊지 않고 있었다. 물기 묻은 손을 들어 바짝 마른 수건의 표면을 매만질 때마다 잊히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니, 하던 아버지의 목소리가 생생히 맴돌았으므로, 그래서 그는 ´잊히다´라는 것에 대해 자주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_「습(濕)」에서(45쪽)
어디로든 또, 가게 되겠지.
생각지 못했던 곳으로.
죽어 벽돌이 되리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것처럼 말이야.
그렇군요.
비밀을 하나 말해줄까?
오른편이 장난스러운 말투로 운을 떼었다.
비밀?
죽기 전에 뭐라고 했는지 기억나?
왼편이 급히 끼어들었다.
뭐라고 하다니요?
떠올려봐, 분명 뭔가 말했을 텐데.
위편마저도 짐짓 놀리는 투였다.
뭐지?
골똘히 생각했지만 좀처럼 기억나지 않아서 나는 모르겠는데요, 하고 말했다.
외톨이가 되었군.
오른편이 말했다.
그렇게 말했지?
네?
외톨이가 되었군, 하고 말이야.
나는 아, 하고 짧게 탄식했다. 발뒤축이 밟혀 신발이 제꺽 벗겨진 사람처럼 당황스러웠다. 어깨에 다시 힘이 들어갔다.
확실하진 않지만, 마지막으로 그렇게 말한 이들만이 벽돌이 된다고 들었네.
어딘지 모르게 한층 너그러워진 말씨로 위편이 말했다.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기분이었다. 어때, 어때, 우습지, 하고 추임을 넣은 건 오른편이었다. 요즘엔 우울한 사람들이 많아서, 자리가 부족할 정도지, 로테이션이 빠르단 건 그 얘기였어, 왼편이 말했다.
_「그리고 남겨진 것들」에서(65~66쪽)
인간도 결국에는 누군가의 먹이가 된다. 타인의 배를 불리는 먹잇감으로 전락하고야 만다. 그것을 알면서도 인간은 최선을 다해 제 키를 키우고 몸집을 불려 먼바다로 나아가는 범고래와도 같이, 방류된다. 하지만 방류된 모든 범고래에게 거센 물살을 가르고 대양으로 헤엄쳐가는 시간이 허락되는 건 아니야. 그런 걸까. 세계란 결국, 그런 것일까. 마셔라. 너 한 잔, 또 나 한 잔 마신다, 라는 투로 우리는 소주병을 비웠다. 명이 어깨를 옴츠리고, 취기에 어, 너 참, 너 참, 중얼거리며 비틀대는 횟수가 더해질 때마다 그러나 서글프도록 나는 조금씩 알아차리게 되었다. 인간이 범고래 한 마리를 지킬 수 없어서 인생이 야속한 게 아니라, 자식이 제 부모 하나를 지키지 못해서, 그게 서러워서 명은 무서웠을 거라고. 배를 타지 않으면서 작은아버지는 눈에 띄게 키가 줄고, 어깨가 좁아지고, 말수가 적어졌다.
_「시절의 폭」에서(270쪽~271쪽)
● 작가의 말
어느덧 세번째 소설집을 묶는다. 돌아보니 시간이 참 덧없다. 아차, 하는 순간에 인생은 이만큼 와 있다. 이 소설들은 꽤 오래도록, 긴 밤, 고독한 때에 쓰였다. 어떻게 이토록 무력할까, 그리운 것은 어째서 모두 멀리 있을까, 고민하는 때엔 여지없이 고독했고, 그럴 때면 지키고 싶은 것에 대해, 소중한 것에 대해, 아름답다 여기는 것에 대해, 그리하여 끝내 마음 아파지는 것에 대해, 쓰게 되었다. 잊지 않기 위해, 기억하기 위해서.
음악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고백하자면 매일 들으며, 위로 받으며 썼다. 비틀스와 트래비스, 콜드플레이와 서태지는 늘 듣는 것이고, 듀크 조단 트리오나 에디 히긴스 트리오의 시디를 걸어놓는 때도 많았다. 「노래하는 밤 아무도」는 도어스를, 「눈물이 서 있다」는 김일두를, 「시절의 폭」은 산울림을, 「청색시대」는 제이크 버그를, 표제작인 「그리고 남겨진 것들」은 당연히, 넬을 들으며 쓴 소설이다.
언제고 그렇지 않은 적이 없었으나 눈감고 싶은 것이 유독 많은 날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라는 것이 있다면, 우리 부디 자주, 살피길. 잘 들어주길. 침묵하거나 망각하지 않길. 타인의 안부를 묻는 데 주저하지 말길. 지금, 서로, 어디냐고 물어봐주길.
그리고,
근사한 사람이 되고 싶다.
우리 뒤에 멀리 있는 바다를, 잊지 않고 싶다.
계속 같이 있는 사람이고 싶다.
나는 단지, 질문하다 사라질지라도.
2014년 가을
염승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