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련은 1940년대의 일제 식민지와 해방공간을 통과하면서 몇 편의 글을 남긴 여성작가이다. 그녀가 임화의 아내라는 사실을 환기시키지 않는다면 지하련의 존재감은 아직 일반 독자들에게는 상대적으로 미미할 것 같다. 1941년 문장지에 실린 등단인사에서 지하련은 ‘색채가 풍부한 찬란한 생생한 문학’은 자신이 바란다 해도 가망이 없지만 ‘단지 내게 있다면 어디까지 한껏 구속받은 눈’이 있어서 그녀의 ‘애꾸눈이 흐리지 말았으면 그래서 윽박질리운 내 인간들을 너무 천대하지 말았으면’ 바란다고 쓰고 있다. 지하련이 말한 대로 그녀의 소설은 장황하거나 화려하지 않다. 그녀의 담백하고 간결한 문체는 오늘의 독자 입장에서 보더라도 모던하고 쿨한 편이다. 그녀 소설의 구성 또한 큰 굴곡 없이 사람들의 일상을 특유의 색채로 잔잔하게 담아내는 것들이다. 그리고 지하련이 바란 대로 그녀의 소설에는 ‘흐리지 않은 눈’이 있다. 섬세하면서 정직한 눈으로 불구의 세상을 짚는 그녀의 글은 그래서 심지가 깊다. 그녀는 세상이 요구하는 애꾸눈을 거부하고 동요함 없이 그 일관성을 지켰다. ‘지하련 읽기’의 1권에는 ‘결별’ ‘가을’ ‘산길’ 이렇게 세 편의 단편소설을 실었다. 독립적인 세 단편은 비슷하게 기혼 남녀간의 애증에 관한 설정이지만 각 소설의 주인공들은 각자 다른 입장에서 이야기를 전개한다. 여성주의 색채를 띠는 이들 세 단편을 옴니버스처럼 이렇게 엮어 읽는 재미도 좋은 것 같다. 다만 그녀의 작품을 선뜻 여성주의로 범주화하기에 조심스러워지는 것은 지하련의 여성주의가 방어적이거나 공격적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권말에 지하련의 수필 ‘광나루’를 실었다. 이 짧은 글에서 묘사했던 지금부터 6-70여 년 전의 ‘세속적 수속이 필요치 않은’ 당당한 여인과 ‘세상판 대하는 데 절차와 수속을 밝는’ 의기 있던 여인의 맥은 어디로 사라진 것인지 한 번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2권에는 좀더 정치사회성 있는 글이라고 생각되는 세 단편소설을 엮었다. 해방 직후의 혼란기를 딥포커스의 렌즈로 담은 듯한 개성적인 작품 ‘도정’과 이보다 앞선 시기에 쓴 ‘체향초’와 ‘양’이다. 뒤의 두 작품은 사회주의운동을 하다 옥고를 치르고 낙향하여 지내던 작가 자신의 오빠를 모델로 쓴 것이라 전해지는데 식민지시대 지식인들의 무력한 일상을 그린 파리한 자화상 같은 작품들이다. 2권의 말미에는 지하련의 시 ‘어느 야속한 동포가 있어’와 그녀가 등단 당시에 썼던 수수한 인사말을 실었다. 그녀의 시에서는 그녀가 감당할 수 없었던 세파에 대한 절망과 사람에 대한 안타까움이 묻어난다. 그녀가 가졌던 수수한 소망에 대해 세상이 저지른 짓은 너무 가혹한 것이어서 슬픈 마음이 든다. 아마도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은 내용과 형식면에서 이 작품들이 1940년대에 쓰였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느껴질 것이다. 그리고 1940년대 그 엄혹한 시절의 억압의 정체가 오늘의 그것과 별반 다르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 새삼스러워질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