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은 누구나 좋아한다. 하루 여행이든 한 달 여행이든 일 년의 여행이든, 여행은 우리에게 감미로운 생명수를 퍼 올려준다.
흔히들 말한다. 인생은 평생을 거쳐 여행하는 것이라고… 다만, 그 순례의 여행길에서 단 한 번 ‘환승’하지 않고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이미 승리의 월계관을 받은 사람이나 다름없다.
오늘도 불신과 배반이 낳은 간이역의 레일 위에 ‘이성(異性)’의 한쪽 날개들이 부러져 나간 채 서성이는 사람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어느 날 미옥이 엄마가 나를 찾아와 말해준 것은 그것이었다.
오늘을 사는 사람들이 사랑의 존재를 변질시켜 놓는 바람에 원초적으로 존귀한 사랑이 그 자리를 빼앗겨 울부짖고 있다고…
존엄한 사랑의 권리마저 빼앗겨 버려 슬피 울고 있다고…
남들이 말로만 사랑한다 하는 소리에 나도 따라 하면 마치 내 사랑이 찾아오는 것처럼, 사람들은 사랑의 길도, 법도 모르면서 무작정 사랑을 찾아 헤매인다.
혼이 빠져나간 검은 머리 동물들이… 그렇게… 뙤약볕 아래 헝클어진 마른 갈대가 갈증을 느끼는 것처럼… 종횡무진, ‘생(生)’의 나침판을 잃어버린 사막의 조난자처럼 헤매고 있다.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있음에도 주변인들에게 지탄받는 것조차 개의치 않고 색다른 ‘환승역’을 찾아 휘청거리고 있다.
그러다 싫증나면 도중하차하여 또 다른 ‘환승역’을 찾아 결국엔 사랑의 광대가 되어 버린다.
오늘도 참을 수 없는 욕망의 불을 끄지 못해 이름 없는 간이역에서 환승하려는 사람들이 몰려 장사진을 이루고 있는데도, 모두가 공범자의 대열에 끼어들 뿐, 그 어디에도 이 시대의 진정한 ‘파수꾼’이 되어주고자 하는 의로운 간이역장은 좀처럼 찾아볼 수 없다.
거기에는 어떤 이유가 따로 없다. 오로지 있다면 민초들과 지배계층 권세가들의 신분만이 존재할 뿐이다.
오늘도 승냥이와 유혹의 고양이들이 퍼트리는 쾌락의 돌연변이 포자가 골목마다 ‘쓰나미’가 되어 퍼져 나가는 사이로, 사랑을 흥정하는 소리가 가늘한 밤공기를 타고 회색 빌딩숲에 불처럼 번져 나가고 있다.
내일은 믿을 수 없다며 속빈 강정들이 내던지는 흉물스러운 증오의 짚더미에 올라앉아 마치 ‘킬리만자로의’ 표범처럼 색색거리며 또 하룻밤을 기다리며 상실한 반쪽을 찾아 나서고 있다.
사랑아, 나는 네가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내가 너를 더 사랑한다는 것을 알기나 하니…?
그 가식적인 해원의 ‘노스텔지어’의 손수건을 흔들며 ‘감언이설’을 쏟아 놓는다. 승냥이들의 검은 유혹에 더 이상 끌려가지 말라며… 나는 네가 보여주고 있는 것보다도 더 아낌없는 사랑을 주고 있다는 것을 알기나 하느냐고… 그렇게…
상대를 향한 먹잇감 사슬을 옥죄는 소리가 빌딩숲으로 펴져 나가는 사이로, 한밤중 닭을 훔쳐가는 승냥이들의 모습처럼… 칠흑의 밤을 병풍 삼아 담장을 넘어 들어오고 있는 것조차 드러날까 봐 환각에 빠져 있는 ‘이성’들이 벌거벗은 채 밤바다를 유영하고 있다.
그것이 내가 미옥이 엄마한테 들은 이야기의 전말이었다. 그 후 나는 몇 날을 고민하던 끝에 이 시대 사랑의 정체를 해부하여 세상에 펼쳐 놓고 싶어 이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오늘도 솜사탕처럼 가벼워져 훅, 불면 날아갈 것만 같은 일회성 사랑의 존재가 난무하는 세상이다 보니, 아침에 잠깐 조우하고는 하루 종일 밖에 나가 주인 없는 몸이라며 사랑을 팔고 사는 광장에서 검은 유혹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 몸부림 치고 있지를 않은가.
미옥이 엄마는 그 사랑의 파수꾼이 되어 달라며 나에게 찾아온 것이다.
이 시대의 사랑은 이미 단물이 빠져나간 거리마다 미각을 잃어버린 채 나뒹굴고 있다고…
오늘도 주인 잃은 사랑들이 거리를 떠돌고 있으니 그 보호자가 되어 달라며… 그렇게 찾아왔다.
‘감언이설’의 고깔모자를 쓰고 투정 어린 욕망의 휴지 하나 깔고 시시덕거리다 다시 휴지통에 구겨 넣어 쓰레기로 돌아가는 오늘날의 저, 사랑! 그 거리에 나부끼는 속빈 허수아비 사랑들의 자화상을 두 눈 뜨고 바라볼 수 없다며 미옥이 엄마는 찾아온 것이다.
밤하늘에 빛나는 우주의 별들도 저마다 매무새 단장을 하고 머나먼 은하수를 따라 시늉하며 유영하고 있는데, 우리의 사랑은 그처럼 생큼하게 빛나는 사랑을 하기 위한 사랑이 아닌, 존재하는 이유를 던져준 원초적 ‘자아’의 주인마저 배반하자, 도덕의 지킴이들까지 그 주인을 떠나 욕정을 찾아 간이역에서 ‘환승’하려는 모습들이 걱정스러워 찾아왔단다.
그날, 나는 결코 외면할 수 없었기에, 밤이 되어도 잠들지 못한 나머지 결국 모험의 여행길에 오르기로 했다.
정녕, 오늘도 휘청거리는 사람들이 주고받는 ‘환승역’의 개찰구에서 출발해 낮 동안의 간이역을 서성이다 저녁에 들어오는 종착역에 이르기까지…
그 고정된 레일 위의 반짝이는 진정한 삶의 ‘오케스트라’를 들으며 내면의 무쇠 바퀴가 흔들림 없이 반주 소리를 들을 수는 없는 것인지…
나는 그 해답을 얻기 위해, 존경하는 미옥이 엄마가 바라는 이 시대의 변질된 사랑의 정체를 찾아 제자리에 놓아주기 위해 그동안 엮어낸 이 작품을 세상에 펼쳐 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