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명 김해경(金海卿). 1910년 9월 23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1917년 신명학교에 입학해 구본웅(화가, 1906~1953)을 만나 친분을 맺고, 이후 보성고등보통학교 재학 중 화가로서의 꿈을 품기 시작한다.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과(현재 서울대학교) 재학 중 학생 회람지 「난파선」의 편집을 주도하면서 시를 발표했고, 1928년 졸업 앨범에서 평생 동안 필명이 되는 이상(李箱)이라는 이름을 처음으로 사용했다. 건축과를 수석으로 졸업한 후 1929년 조선총독부의 건축기수가 되어 근무하던 중 건축학회지 「조선과건축」의 표지도안 현상 모집에 1등으로 당선된다. 문단 활동은 잡지 「조선(朝鮮)」의 1930년 2월호부터 12월호까지 9회에 걸쳐 그의 유일한 장편소설이기도 한 [12월12일(十二月十二日)]을 `이상`이라는 필명으로 연재하면서 본격적으로 펼쳐졌다. 같은 해 여름 이상은 폐결핵의 증세를 보이기 시작한다. 1931년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자상(自像)`이 입선하고, 「조선과건축」에 일본어로 쓴 시 `이상한가역반응(異常ナ可逆反應)`, `파편의경치` 등 20여 편을 발표하며 활발히 시작 활동을 하다가, 1932년부터는 `건축무한육면각체(建築無限六面角體)`등의 시와 더불어 단편소설 `지도의 암실`, `휴업과 사정` 등을 발표하면서 미술과 시에 이어 소설적 재능도 발휘한다. 그러나 이때부터 폐결핵은 더더욱 악화하기 시작해 결국 1933년 3월 휴직을 하고 황해도의 배천(白川) 온천에 들어가 요양을 하게 되나, 병과 죽음에 대한 공포를 문학에 대한 열정으로 승화해 본격적으로 글쓰기에 매진한다. 이후 요양지에서 만난 기생 금홍과 종로에 다방 ‘제비’를 차려 운영하며 시인 정지용, 김기림, 소설가 이태준, 박태원 등과 교류하다가 「가톨닉청년」에 `꽃나무`, `이런시` 등의 국문시를 발표하면서 일본어 글쓰기를 중단한다. 1934년에는 김유정, 김환태 등과 함께 `구인회`의 동인이 되었고 「조선중앙일보」에 문제시 `오감도(烏瞰圖)`를 연재하지만, 독자들의 항의로 15편을 발표한 이후 연재를 중단하게 된다. 그러나 소설 `지팡이 역사`, 수필 `혈서삼태`와 `산책의 가을` 등을 발표하였고, 1935년에는 박태원의 소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이 연재되는 동안 삽화를 맡아 그리기도 하는 등 창작 활동은 계속되지만, 사적으로는 다방 ‘제비’를 폐업한 뒤 금홍과 결별, 이후에도 ‘69’등의 카페를 경영하다가 문을 닫는다. 이에 어린 시절부터 절친했던 친구인 화가 구본웅이 인쇄소 창문사에 이상의 일자리를 주선하여 근무하면서 1936년, 구인회의 동인지인 「시와소설」을 창간하고 편집해 발간한다. 이후 단편소설 `지주회시`, `날개` 등으로 평단의 관심과 호응을 얻으며 시와 수필을 왕성하게 발표한다. 6월에는 결혼하지만 새로운 문학 세계를 추구하고자 10월경 일본 동경으로 떠난다. 이듬해인 1937년 2월, 이상은 동경 니시간다 경찰서에 사상 불손이라는 혐의로 수감되어 조사를 받던 중 폐결핵이 악화되어 동경제국대학 부속병원으로 옮겨진다. 그해 4월 17일 그곳에서, 28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