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적 상상력을 환기시킨 수작”
메밀꽃 피는 봉평의 가을의 목전에, 최고의 한국 중단편 소설을 가려 뽑는 《이효석문학상 수상작품집 2016》이 출간되었다. 시적 서사를 소설로 풀어낸 이효석 소설가의 문학적 업적을 기림과 동시에 한국문학에 길이 빛날 발자취를 남긴 소설을 선정했다. 심사대상 작품은 2015년 6월 1일 이후 2016년 5월 31일까지 월간, 계간, 문학잡지에 발표된 모든 중단편 소설을 대상으로 삼았다. 심사위원으로는 소설가인 오정희 심사위원장을 비롯, 정홍수(문학평론가), 신수정(문학평론가), 정지아(소설가), 백지연(문학평론가), 이수형(문학평론가), 이기호(소설가)가 총 8편의 작품이 본심에 선정했고, 최종 대상작으로는 조해진 소설가의 <산책자의 행복>이 선정되었다.
<산책자의 행복>은 경제적 위기와 맞물린 소외와 불안의 문제를 한 개인의 삶을 통해 섬세하게 포착해 지금 이 시대에 문학은 무엇을 보여줄 수 있는지를 환기하는 작품이다. 대학 강사에서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으로 위치가 바뀐 한 지식인의 고통과 좌절을 세심하게 그려낸 이 작품에서 우리가 거듭 묻게 되는 것은 ‘살아 있다는 감각’이다. 눈앞에서 한 세계가 문을 닫아버리는 경험은 소통되지 않는 편지를 통해 더욱 절절하게 다가온다.
수상작 외에는 2015년 수상작가인 전성태 소설가의 자선작 <영접>과 본심에 올랐던 추천우수작 7편을 함께 실어 선보인다. 작품으로는 권여선 작가의 <당신이 알지 못하나이다>, 김사과 작가의 <카레가 있는 책상>, 김숨 작가의 <선량한 어머니의 아들들은 어떻게 자라나>, 김유진 작가의 <비극 이후>, 박형서 작가의 <개기일식>, 이장욱 작가의 <최저임금의 결정>, 정미경 작가의 <못>이 실려 있다. 각 작품 말미에는 《매일경제신문》 김유태 기자의 지상중계 내용을 ‘내용요약’으로 실었으며, 대상 수상작가와의 인터뷰 등이 포함되어 있어 다채로움을 더한다.
여성성, 변화, 그리고 선택과 집중
대학의 철학과 강사인 홍미영은 가르치던 철학과 과목이 인문학과로 편입되며 실직한다. 엄마의 병원비와 은행 이자를 내다 결국 개인파산을 신청한다. 실존을 가르치던 대학 강사는 기초생활수급자이자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으로 전락한다. 생계를 국가에 의탁하는 사회의 가장자리로 밀리는 것을 경험한다. 미영을 라오슈(老師, 스승)로 따르던 중국 유학생 메이린은 가끔 편지를 보내온다. 하지만 그녀는 답장은 쓰지 않는다. 메이린은 한결같이 미영을 추앙하지만 라오슈를 벗고 미영을 입은 지 오래다.
이처럼 <산책자의 행복>에는 함부로 가늠하기 어려운 삶의 방향성과 존재와 부재, 그리고 원죄의식 등 철학적인 주제를 담고 있다. 계산대에서 담배를 주문하다가 교수님의 얼굴을 알아보고 인사를 하는 남학생의 뒷모습에 주인공은 철렁해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한다. 또 다른 손님이 “홍미영 교수님 아니세요?”라고 묻는 질문에는 ‘아니다’라고 본인을 부정하는 상황도 생긴다. 밤중의 편의점이 주는 분위기마냥 삶은 불안함으로 가득하지만 살아야 한다. 살아내야 한다. 대학 강단에서의 라오슈가 “살아 있는 동안엔 살아 있다는 감각에 집중하면 좋겠구나”라던 조언은 자신에게 하는 독백으로 돌아온다.
“사는 게 이토록 무서운 거니, 메이린?”
결국 죽음을 두고 라오슈는 “죽음은 존재를 완성하고 성숙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추상적인 과정”이라 말하고, 제자인 메이린은 “죽음은 채워지지 않는 식탁의 빈자리”라고 각자가 서로에게, 그리고 다시 자신에게 되뇌인다. 인간의 최소한의 품위조차 지키지 못하는 세계에서, 삶의 기반이 무너지는 경험을 한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 부재와 삶에 대한 이야기를 지켜내는 수작이다. 이지훈 평론가 역시 “행복은 완수될 가능성이 없다는 것. 행복은 우리의 삶을 따라 끊임없이 유예된다는 것. 그러므로 우리가 행복해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삶의 감각을 일깨우는 것, 다시 말해 산책뿐이다”라고 논한다. 이제 남은 것은 우리의 산책이다. 산책할 준비가 되었는가. 낯선 세계를 발견하고, 우리 안의 부재를 감당할 준비가 되었는가를 소설은 질문한다.
2016 이효석문학상 우수작품상 수상작
대상작 외에도 총 7편의 우수작품상 수상작이 함께 실려 있다. 여고생 살인사건에서 인생이라는 비극을 탐구한 권여선의 <당신이 알지 못하나이다>는 여고생 사망이란 범속한 소재를 신의 무지(無知)란 주제로 격상시킨다. “주여, 저들을 용서하소서. 저들은 저들이 하는 짓을 알지 못하나이다”란 신약성경(누가복음 23장 34절)을 제목으로 비틀었다.
김사과 작가의 <카레가 있는 책상>은 ‘골방’에서 ‘1인칭’으로 ‘자기고백’을 하는 한 여성혐오자의 심리를 담은 소설이다. 어두운 고시원에서 인스턴트 카레만 먹고 사는 그는 의지, 욕망, 관심, 두려움이란 단어를 자신의 심연에서 제거해버린 상태이다. 그는 고시원의 이웃에게 “카레 냄새를 풍긴다”는 이유로 집단 린치를 당한다. 타자를 향한 타자의 혐오는 다른 타자에게 전염된다. 격자 같은 고시원 쪽방에 숨어 살며 ‘인간혐오자’인 주인공은 버블티 카페에서 만난 미모의 아르바이트생을 스토킹하고 (성)범죄 욕구를 느낀다. 고시원의 한 남성을 통해 ‘악의 본질을 살펴본다. 또한 작가는 혐오의 전이, 악의 평범함, 우연과 필연의 관계 등을 이 단편에 담아 소개한다.
행정고시에 여러 차례 낙방한 뒤 42세가 되도록 7급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장남을 만나러 혜숙은 남편과 함께 차남이 운전하는 영천 행(行) 차에 오른다. 둘째는 7년 전 성당에서 벌어진 혜숙의 낯 뜨거운 자리싸움을 기억해내며 엄마를 자극한다. 차에 타기 직전 한 초등학생에게 휴대폰을 잠시 빌려줬던 혜숙은 “아들이 사라졌다”는 한 여자의 전화에 시달린다. 며느리에게 엄마의 자리를, 남편의 무심함에 아내의 자리를 잃어버린 혜숙의 공허함은 우리네 엄마들이 잃어버린 존재의 이유로 읽힌다. 한때 자녀들에게 태양이었으며 남편에게는 달(月)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 ‘소실점처럼’ 사라지고 마는 여자의 삶을 작가는 혜숙에게서 발견한다. 김숨 소설가는 〈선량한 어머니의 아들들은 어떻게 자라나〉에서 모성(母性)의 자리라는 화두로 소설적 심연을 또 한 번 확장했다.
〈비극 이후〉는 이별 혹은 죽음을 겪은 당사자에게 상실과 몰락의 심경을 생생하게 묻고 비극을 겪은 뒤 우리들이 무엇을 기억해야 할지, 또 삶을 지탱하기 위한 심리적 기반이 무엇인지를 고민케 한다. 멀지 않은 휴양지로 떠난 비행기에 오른 수인의 이야기로 소설은 출발한다. 남태평양 태풍에 내심 결항을 기대했지만 비행기는 예정대로 이륙한다. 수인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무감각하다. 친구 B와의 이별을 겪은 지 오래되지 않은 탓이다. 〈비극 이후〉는 흔한 해프닝도 당사자에게 재난일 수 있음을 말한다.
〈개기일식〉은 이 세상의 모든 서사들이 품고 있는지도 모를 어떤 음모론을 겨냥한 우화이다. 박형서 소설가는 두 교수의 상이한 작법 강의로 세상의 모든 이야기를 비유해낸다. 소설, 연극, 드라마, 영화 등의 공통분모는 서사, 즉 이야기다. 형식이 달라졌어도 서사는 인간과 동행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잘 짜인 서사는 인간에게 감동이나 교훈 또는 흥분을 안기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확신보다 질문하기 위해 쓰였다. 마구잡이인 현실을 정돈하고 배열하는 게 서사의 본질이어야 할지, 현실 그대로를 거울처럼 반영해 그대로를 보여주는 서사가 바람직한지 소설은 묻는다. 무겁고 굵직한 주제 이면에 깔린 소설가 특유의 유머는 단편소설의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이 이어진다. 그래서 가벼운 마음으로 산책하듯 읽을 수 있다.
편의점 알바생의 죽음 이면에 존재하는 거부하고 싶은 진실을 탐구한 이장욱 소설가의 <최저임금의 결정>. 새벽 4시, 권총을 든 한 남자가 편의점 문을 연다. 야멸찬 분노의 눈빛이다. 남자는 총구를 들이밀며 편의점 사장에게 복수를 하려 한다. 사장이 저지른 잘못은 간명하다. 한 여학생 알바생을 성추행했다. 도망치던 알바생은 마을버스에 치여 즉사했다. 총을 든 남자는 고인이 된 아르바이트생의 애인이다. 그런데 그 순간, 사장이 털어놓은 사실은 소설의 모든 것을 거꾸로 뒤집는다. 누가 악인지, 또 누가 평범한지 알 수 없는 뒤틀린 세상을 이장욱 소설가는 소설로 비유해냈다. 아르바이트생에게 지급하는 최저임금은, “존재의 최저 수준, 존재의 밑바닥”을 확인하게 한다.
정미경 소설가는 시간의 균열이, 감정의 균열이 일어나는 자리에 <못> 하나를 쾅 박아두고는 여태껏 발견되지 못한 이별의 의미를 추적한다. 누구나 말해왔지만 늘 새롭고, 늘 비참했던 ‘사랑과 이별’이란 주제는 이번에도 묵직하다. 잘나가는 금융회사 직원이던 ‘공’은 회사에서 잘린 뒤 마트 가전제품 직원 ‘금희’와 밀회를 즐긴다. 영화를 보고, 길고양이를 주워다 키운다. 어느 날 남자는 약속을 어기더니 다른 회사로 출근한다는 전화 한 통을 남긴다. 다시 오겠다는 말은 없다. 두 사람의 밀회 공간이 한 사람만의 폐허로 변하는 순간이다.
2016 이효석문학상 심사평
2016년 제17회 이효석문학상 심사를 위해 오정희 심사위원장을 포함한 정홍수, 신수정, 정지아, 백지연, 이수형, 이기호 심사위원은 7월 11일 1차 심사(예심)에서 권여선, 김사과, 김숨, 김유진, 박형서, 이장욱, 정미경, 조해진의 소설을 본심 후보작으로 선정하였다. 이들 작품은 현재 우리 사회가 당면한 문제들을 포착하는 문학의 다채로운 시선을 두루 확인하게 하였다. 8월 2일 진행된 2차 심사(본심)에서는 권여선, 김숨, 정미경, 조해진의 작품을 두고 집중적인 토론과 논의를 진행하였다.
김유진의 〈비극 이후〉는 상실과 애도의 서사를 치밀하고 세련되게 서술한 우아한 소설이다. 이 소설에서 한껏 팽창되는 이미지와 감각의 글쓰기는 김사과의 〈카레가 있는 책상〉과도 맞닿는다.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벌어지는 폭력과 혐오의 사건을 향해 의식의 예민한 날을 세우는 이 소설은 차별과 소외가 어떤 방식으로 우리 일상에 깊이 스며들어있는가를 실감하게 한다. 이장욱의 〈최저임금의 결정〉은 망상과 현실의 숨 가쁜 교차를 통해 객관적이라고 생각하는 현상 뒤에 숨겨진 부조리한 진실을 서늘하게 주시하는 매력적인 작품이다. 날렵하고 매끄러운 구성을 통해 문학적 상상력의 존재 의미를 뒤집어보는 박형서의 〈개기일식〉 역시 독자와 소통하는 이야기의 재미를 한껏 주는 시도로 반갑게 다가왔다.
과거의 기억을 현재화하는 소설의 끈질긴 두드림으로 권여선의 〈당신이 알지 못하나이다〉가 남기는 물음의 파장은 상당하다. 오해와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내쳐진 삶이 제기하는 윤리적 주제를 추적하는 소설의 에너지가 중편의 형식으로 묵직하게 와 닿았다. 김숨의 〈선량한 어머니의 아들들은 어떻게 자라나〉는 개인의 내면에 갇힌 합리성과 윤리가 현실에서 어떻게 왜곡되고 미끄러지는지를 그로테스크한 부조리극으로 포착해보인다. 정미경의 〈못〉은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집요한 통찰을 멈추지 않는 작가의 미덕과 솜씨를 새삼 확인시킨 작품이다. 속물적 삶을 다각적으로 살피는 치밀하고 정교한 구성에 매혹되지 않을 수 없었다. 조해진의 〈산책자의 행복〉은 경제적 위기와 맞물린 소외와 불안의 문제를 한 개인의 삶을 통해 섬세하게 포착함으로써 지금 이 시대에 호응할 수 있는 문학의 상상력이 무엇인가를 새롭게 환기하였다.
작품들 각각의 빛나는 일면을 새기면서 오랜 시간 뜨거운 토론과 논의를 거친 끝에 심사위원들은 조해진의 〈산책자의 행복〉을 수상작으로 선정하였다. 대학 강단에서 편의점 공간으로 이동한 지식인의 좌절과 고통을 세심하게 그려낸 이 작품에서 우리가 거듭 묻게 되는 것은 ‘살아 있다는 감각’의 구체성일 것이다. 눈앞에서 한 세계가 문을 닫아버리는 듯한 불안의 삶은 소통되지 않는 편지와 고백의 은유를 통해 더욱 절실한 울림으로 다가온다. 꿈꾸고 사유하는 관념의 자리와 내일을 도모하는 생계의 자리 사이에 힘겹게 다리를 놓으려는 이 소설의 고독한 분투에 깊이 공감하며 그 노력이 새로운 세계의 문을 열 수 있기를 바란다. 조해진 작가의 수상을 진심으로 축하하며 함께 후보작에 오른 다른 7분의 작가들과 관심을 보내주신 여러 독자들께도 깊이 감사드린다.
오정희, 정홍수, 신수정, 정지아, 백지연, 이수형, 이기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