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인의 호는 금동(琴童), 필명은 춘사(春士) 혹은 김시어딤. 1900년 10월 2일 평남 평양 출생. 일본 메이지학원(明治學院) 중학부와 가와바다미술학교(川端畵學校)에서 수학하였다.
1919년 주요한(朱耀翰)?전영택(田榮澤)?최승만(崔承萬)?김환(金煥) 등과 함께 문학동인지인 『창조』를 발간하면서 처녀작 「약한 자의 슬픔」을 발표하였다. 1919년 3월에는 아우 김동평(金東平)의 3?1운동 격문을 써준 것이 발각되어 출판법 위반 혐의로 6개월간 투. 이후 「마음이 옅은 자여」(1919), 「배따라기」(1921), 「목숨」(1921) 등과 같은 작품에서 이광수의 계몽주의문학에 맞서 예술지상주의적 경향을 표방하였다. 1923년에 첫 창작집인 『목숨』을 창조사에서 출간하였고, 『창조』의 후신인 『영대』를 발간하였다. 『영대』 동인으로는 『창조』 동인 외에도 김여제(金與濟)?김소월(金素月) 등이 참가하였다. 1925년에는 「명문」, 「감자」, 「시골 황서방」과 같이 자연주의적 작품을 발표하여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1926년에는 기울어진 가산을 회복하고자 보통강 토지관개사업에 착수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929년에 춘원의 계몽주의문학관에 대립되는 예술주의문학관을 바탕으로 「근대소설고」를 발표하였고, 이듬해에는 「광염소나타」, 「광화사」와 같은 유미주의 계열의 단편을 발표하였다. 1930년부터 생활고를 해결하기 위해 신문연재소설에도 관심을 기울였는데, 「젊은 그들」(1930~1931), 「운현궁의 봄」(1933), 「왕부의 낙조」(1935), 「대수양」(1941) 등이 대표작이다. 역사소설 중에서 특히 「대수양」과 「젊은 그들」은 세조와 대원군을 긍정적인 인물로 그려내고 있다는 점에서 특이하다.
1946년 전조선문필가협회의 결성을 주선하는 한편, 일제 말기에 벌어진 문학인의 친일행위, 특히 이광수의 친일행위를 비판적으로 그려낸 「반역자」(1946), 「망국인기」(1947), 「속 망국인기」(1948) 등의 단편을 발표하였다. 1951년 1월 5일 서울 성동구 하왕십리동 자택에서 사망하였다.